사람들은 보다 안전하고 청결한 장소에서, 더 프라이빗한 목욕을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목욕의 개념이 ‘함께 즐기는 문화’에서 ‘오롯한 개인의 순간’으로 전환된 것입니다.
목욕에도 패러다임이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대중 목욕탕이 ‘동네 사랑방’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단란한 가족들이 주말마다 찜질방을 찾았으며, 친구의 등을 밀어주는 행위는 친밀함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90년대 이전 출생자들에게 묻는다면 대부분 주저없이 회상할 수 있을 정도로 일반적인 문화였죠.
‘함께 목욕’의 시대는 팬데믹과 함께 저물었습니다. 코로나19를 지나며 대중목욕탕 대다수가 폐업했고, 간신히 살아남은 곳마저 영업종료를 고민하는 실정입니다. 2020년부터 2023년 사이에 문을 닫은 목욕장업(목욕탕, 사우나, 찜질방) 업소가 1,000곳 이상이라는 점은 사뭇 놀랍습니다.
이에 따라 부상한 것이 자쿠지입니다. 사람들은 보다 안전하고 청결한 장소에서, 더 프라이빗한 목욕을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목욕의 개념이 ‘함께 즐기는 문화’에서 ‘오롯한 개인의 순간’으로 전환된 것입니다.
그러자 목욕에서도 미적인 요소가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개개인의 선호를 따르는 ‘취향경제’ 또한 생겨났죠. 가령 수많은 향기를 선택할 수 있는 입욕제와, 목욕 중 가볍게 음미할 수 있는 샴페인처럼요. 즉 과거의 사람들이 함께 몸을 담그고 수다를 떨었다면, 2024년의 우리는 고요한 개인 자쿠지에서 나만의 음악을 튼 채 독서를 즐기곤 합니다.
그래서 자쿠지, 정체가 뭐니?
많은 사람이 자쿠지를 단순한 ‘물받이 욕조’의 의미로 사용하곤 합니다. 언뜻 들으면 일본어와 가까운 어감이기도 하죠.
하지만 자쿠지(Jacuzzi)는 20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이민한 자쿠지 7형제의 성씨입니다. 자쿠지 형제들은 ‘자쿠지 회사(Jacuzzi Inc.)’를 설립해 농업용 펌프를 개발하고, 한때 항공 산업에 뛰어들어 큰 돈을 벌기도 했습니다.
자쿠지의 전신은 1968년 탄생했습니다.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는 가문의 어린 형제를 치료하기 위해, 로이 자쿠지(Roy Jacuzzi)가 맞춤형 1인 수압 치료기를 발명한 것입니다. 그는 가정용 펌프를 이용해 욕조에 가열된 물을 지속적으로 유입하고, 물길을 통해 신체 근육을 자극할 수 있도록 기기를 개조했습니다. 최초의 현대식 월풀 욕조가 탄생한 것이죠. 즉 자쿠지의 정의는 물의 온도가 따뜻하게 유지되고, 수압 마사지를 제공하는 1인용 목욕 공간입니다.
배경에 스며들기
멕시코의 산호세 델 카보에 위치한 바이스로이 로스 카보스 호텔은 특별한 자쿠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벽이 없는 것처럼 연출된 통창을 통해 코르테스해의 수평선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때 자쿠지는 안전한 요람처럼 기능합니다. 완전히 개방되었지만, 동시에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는 독특한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죠.
일본에서도 유사한 자쿠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힐튼 후쿠오카 씨호크 고층 객실에 마련된 자쿠지입니다. 초현실적인 풍경은 마치 공중에 부유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가파른 삼각형 각도의 통창으로 후쿠오카 앞바다를 조망할 수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쿠지는 어떤가요? 스위스 디아볼레짜 산 꼭대기에 위치한 호텔 베르그하우스 디아볼레짜의 이야기입니다. 해발고도 3,000미터에 위치한 야외 자쿠지에서는 설산을 배경으로 목욕을 즐길 수 있습니다. 주변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에 들어온 듯한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힘든 시대, 순간의 휴식이라도
“어떻게 하면 잘 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시대입니다. 그저 일상을 사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힘이 들고, 스트레스가 몸을 할퀴고 지나갑니다. 비단 개인의 문제 뿐인가요. 정치적 혼란부터 불경기까지, 우리는 온갖 불확실성과 맞서야 합니다. 이 순간, 자쿠지가 목욕 도구가 아닌 ‘치료 도구’였다는 사실은 생각할 지점을 제공합니다.
그렇게 보면 한국인이 자쿠지를 좋아하는 건 당연합니다. 늘 세계 하위권을 기록하는 행복지수와, 평균치 이상의 스트레스 지수를 보유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KB경영연구소의 ‘2024 한국 웰니스 보고서’에서는 한국인 10명 중 6명이 최근 1년간 정신건강 문제를 겪은 적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자쿠지의 부상은 ‘명상’ ‘요가’ ‘러닝’ 키워드의 인기와 궤를 같이 합니다. 바로 코로나 팬데믹을 기점으로 떠오른 1인 웰니스 문화입니다. 삶의 질을 중요시하고, 신체 건강과 함께 ‘마음 챙김’의 경험까지 추구하는 이들이 늘어난다는 방증이죠.
따뜻한 물이 넘실대는 욕조를 떠올려 보세요. 더운 공기에 입욕제의 향이 스며들고, 거품이 피부를 간질이며 올라옵니다. 실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목욕의 우울 해소 효과는 규칙적인 유산소 운동보다 뛰어납니다. ‘우울은 수용성’이라는 문구가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는 셈이죠. 어쩌면 자쿠지를 찾는다는 건, 우리가 치유의 순간을 간절히 원한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